감상평

장자의 놀라운 통찰 그리고 나무 이야기는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를 한국 사회 문제와 연결지은 스토리텔링에 감동했습니다. 강신주 철학자의 재치있는 표현과 전달력이 탐나내요.

내용

장자 이야기 요약

대도시 근처에 거대한 나무 하나가 있었다. 이는 매우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나무들은 도시 사람들에 의해 재목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잘려가지 않고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첫 째, 가지가 구불구불하다. 조선 왕조 때 소나무를 재목으로 썼었는데, 곧은 소나무만 쓰고 구불구불한 소나무는 사용하지 않았다. 둘 째, 푸석푸석하다. 그래서 관으로 사용할 수 없다. 셋 째, 치명적인 입사귀를 가졌다. 입사귀를 핥으면 상처가 나고, 냄새를 맡으면 3일간 사람이 맛이간다. 이 나무는 굉장히도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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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의 잔인함

쓸모있는 나무인 재목이 사용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재목을 발견한다.
  2. 살아있는 나무를 베어 죽인다.
  3. 잘 말린다. 변형되지 않도록.
  4. 모양에 맡게 재단한다.
  5. 조립한다.
  6. 평생, 교채되기 전까지는 그 위치에 고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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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인간의 삶에 대입할 수 있습니다.

  1. 어린 영재를 발굴하고 길러냅니다.
  2. 사회에 순응하게 만듭니다.
  3. 사회의 부품으로 사용합니다.

사회의 부품으로써 사용하기 위해 이들은 변형돼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죽이고 말려야합니다. 스스로를 제한하고 희생해야합니다. ‘쓸모’란 사회 시스템에 부합하기 위해 개인은 죽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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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無用)

대한민국의 청년 자살의 심각성은 익히들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이 자살하는 이유에는 “나는 쓸모없는 존재야” 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자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야, 너는 정말 거대해질 수 도 있어. 너로써 살으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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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있는 자식 쓸모 있는 부모 쓸모 있는 친구 쓸모 있는 직장 동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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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나를,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쓸모 없음에도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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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장폴 사르트르

내 존재는 사회적 “쓸모”보다 먼저 있습니다. 쓸모가 있던지 없던지 나는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살아있음” 그 자체로 고귀하다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데로, 내 멋대로 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그 요구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스로가 사회의 요구에 너무 치우쳐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나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어야할 것 입니다. 저는 인생을 개인과 사회 사이를 계속 이동하는 진자 운동으로 생각합니다. 그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탄력성을 길러야한다고 생각합니다.